최근 한홍수의 화면 속에서 가장 도드라졌던 것은 ‘흑과 백’ 이라고 할 수 있겠다. 검은 것과 흰 것이 견고히 긴장을 유지 하고 있다던가 거대한 흐름을 형성한다던가 검은 것이 흰 것으로 바스라지고 흰 것이 검은
것에 삼켜지는 형상에 작가는 〈De la Nature〉 ‘자연으로부터’라는 이름을 붙여 우리의 감 각을 인도했다.
비슷한 기간 흑과 백이라는 상응의 존재를 드러내는 작가의 작업엔 양면적이니 이분법적이니 하는 수사들
이 어울렸다. 우리는 왼쪽과 오른쪽을 양면적이라 말했고 가 는 것과 오는 것, 밝거나 어두운 것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곤 했다. 그리고 많은 이들의 주지처럼 한홍수의 일대기에서 동양과 서양을, 작가의 화업에서 예술과 삶이라는 인간사의 고 등한 사유들을 빗대어 그의 화면을 이야기했다.
De la Nature-230905, 54x65cm, oil on canvas, 2023
이번 〈De la Nature〉전에 출품된 10여점의 흑과 백 존재들은 앞서 이야기했던 시즌의 작업들 보다 구체적인 정동(情動)을 드러내기에 작가의 사유가 이분의 세계 어느 목전에 도달한 것임을 짐작하게 한다. ‘자연Nature’이라는 작가의 인도는 여전하지만 그것이 내포한 기운은 보다 구체적으로 역동적이고 거대해 그것들의 흐름 너머에 또 다른 격류 혹은 화면을 딛고 요동치는 기개 같은 것들을 연계하고 있다. 한 시인이
“바람과 빛의 뒤섞임으로 내륙인 샹파뉴의 한 구석이 바닷가 풍경을 닮게 된다”(마르셀 프루스트, 「들판에 부는 해풍」 中.) 고 은유한 것처럼 작가의 화면은 감상자의 정서를 떠밀어 화 면 너머의 자아 혹은 타아
그 사이의 어딘가로 떠나가게 한다. 또한 이러한 만남으로 작가가 선행했을 여정에 동참하거나 감상자 자신만의 사색을 시작하게 되는데, 이러한 사색에서 관람객은 작가의 인도처럼 자연에 이르거나 자신 내면의
바닷가 같은 개인의 공간을 환유하게 되는 것이다.
이같은 특징을 지닌 작가의 화면은 또 한 번의 역설을 맞이한다. 그것은 그의 화면이 인류의 고등지성이 아닌 인간의 근원감정을 건드린다는 것이다. 예술은 인간이 고안하고 개량해낸 것 중 지성과 감성 등등이 작용하는 고등한 복합체라고 할 수있다. 그렇지만 예술은 비논리적이고 무지성적인 수많은 인간현상 역시 기술해왔다. “우리는 어둠의 바다를 향해 돛을 올리리라 젊은 나그네의 환희에 찬 마음으로”(샤를 보들레르, 「여행」中.)라는 문장에 가득 찬 나그네의 환희와 “어둠 속에서 어린애처럼 두려움에 떨지만 한밤에도 태연한 어른처럼 이토록 자신 있는”(자크 프레베르, 『절망이 벤치에 앉아있다.』 中.)이라는 문장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멜랑콜리함 역시 예술은 상반해 왔다. 또한 어쩌면 예술은 인간이 만든 양가적인 것 중 도
체와 부도체 사이를 오가는 반도체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통(通)과 불통(不通) 사이의 어떤 미세한 지점들을 오가며 이런 저런 흐름을 가능하게 하는 것. 인간이 지닌 다양 혹은 복잡을 매개하며 다층의 흐름을 가능하게 하는 반도체라는 것이 그의 작업으로 은유하는 예술의 또 다른 이해가 될지도 모르겠다.
이처럼 한홍수의 작업은 우리의 감각과 사유를 인도하는 반도 체이자 인도체로서 삶에 대한 사랑과 애수를 동시에 전하고 있다. 일출과 일몰 앞에 복잡한 인간. 가느다란 의지들이 모여 이루는 큰 줄기 앞에서 주저하는 나. 시야를 뒤덮는 파도 앞에 무력한 우리 등. 거대한 흐름에 편승하거나 그러한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고 전복되어버리는 인간의 다면적인 모습 역시 우리에게 전 하고 있는 것이다. 작가 스스로도 수행적인 과정 속에 치솟아 오르는 자신의 본능을 수차례 고뇌었을 것이다. 이렇게 인간의 근 원감정과 본능에 대한 고뇌를 수반하는 예술. 그것이 어쩌면 우리의 삶과 동행해야 할 가장 자연스러운 예술일지도 모른다. 그가 전하는 흑백의 화면이 우리의 관능을 새로이 자극하고 있다.
Comments